스물두 살 봄에 나는 우연히 한 노년 가수 A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내 아버지는 그의 열성팬이어서 노래방에 가면 부르는 곡의 대부분이 A의 노래였는데, 동시에 음치에 박치기도 해서 항상 어머니와 나에게 놀림을 당하고는 했다. 덕분에 익히 알고만 있던 그 노래를 원곡자인 A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두 소절 정도까지 듣고 나니 갑자기 감겨가던 눈이 번쩍 뜨였다.
아슬아슬하게 뒤로 밀리는 박자와 간드러지게 자꾸만 꺾이는 선율.
유난스럽게 한 두 박자씩 느리고 어색한 솜씨로 계속해서 목소리를 꺾던 기억 속 아버지의 노래와 몹시 닮아 있었다.
동경하던 음악가를 닮고자 했던 아버지의 노력은 몇 년이 흐른 뒤에야 내게 닿았다. 생소한 종류의 미소가 내 얼굴에 피었다. 오랜 시간을 건너 아버지의 청춘이 내게 번역되는 순간이었다.
술에 취하면 어딘가에서 꼭 기차 소리가 들려왔다. 철컹철컹, 철컹철컹.
기차 소리가 깃들면 그 평범한 뒷마당이 어느 국경 도시의 환승역처럼 느껴졌다. 내가 갈아탈 기차가 어디로 갈지는 안내판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나라는 한 인간이 덧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생소한 가능성, 기차의 목적지가 환기하는 그 가능성은 나를 두렵게도 했지만 매혹하기도 했다.
소설 속 '나'는 종종 사라지는 것을, 정확히는 아무에게도 어떤 의미로도 남지 못하고 잊히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아마도 20년 전 미국으로 건너간 아버지 영수 씨의 실종으로부터 기인했을 것이다. 아무도 그의 마지막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에, '나' 역시도 아무것도 모른 채 그를 묻어야 했다.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을 안고 얕은 핑계로 미국행에 오른 '나'의 앞에는 안젤라라는 이름의 청소 용역 직원이 나타난다. 안젤라는 '나'에게 있어 열쇠였다. 그는 302호라는 망각의 공간을 허물고, 눈빛과 은유를 통해 언어의 장벽을 쉽게 무너뜨리고, 사라진다.
사라지고 나서야 그가 살았던 러스트 빌리지로 향한 '나'는, 비로소 안젤라의 은유가 마음속에서 번역되는 것을 느낀다.
'바람 속으로 사라진 사람들'
'하루에 한 번 거리 전체가 황금빛으로 변하는 동네'
'들판과 계곡이 있는 검은 대지 같은 새장 속의 사내'
한 번도 실제로 본 적 없는 순간들이 '나'의 마음으로 스민다.
공항에 도착해서야 그 소리가 내게만 들리는 사라진 사람들의 언어라는 걸 나는 깨달았다.
아직 번역할 수 없는 먼 곳의 언어였지만, 뚜렷하게 감각되는 위로이기도 했다.
작은 단칸방에서의 조용하지만 소란스러웠던 경험 이후로, 나는 A의 노래와 그것을 부르는 아버지를 절대로 잊을 수 없게 되었다.
아마 소설 속의 '나'도 러스트 빌리지에서의 일과 아버지의 공책, 그리고 안젤라와 영수 씨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의 마음이 매 순간 그것들을 비추지는 않겠지만, 때때로 기차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런 순간들 중 언젠가에는, 기차 속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을 번역하는 일은 '우연'에 기대어야 할 경우가 많아 수동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무엇보다 더 인간을 능동적으로 만드는 행위일 것이다.
어차피 무의식의 세계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 넓고 깊어서 그 세계의 주인 역시 모든 것을 알기가 힘들다. 그렇기에 그 끝없는 세계 속의 어떤 하나를 기억하려면, 그것을 반드시 자신만의 언어로 번역함으로써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나간 시간을 마주하고 잊지 않는 것은, 인간의 가장 주체적인 마음이다. '해석'과 '번역'이 다르고, '기억나는 것'과 '기억하는 것'이 다른 이유다. 이미 사라진 마야의 언어가, 그 뜻을 모른다고 해서 특별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나는 어떤 누구도 타인과 완벽하게 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70억의 사람이 있다면, 70억 가지의 언어가 있을 것이다. 어떤 말들은 같아 보일지라도, 내가 말하는 '사랑'과 A가 말하는 '사랑'이 어떻게 일치할 수 있을까. 그저 마음으로나마 어렴풋이 에두르는 수밖에 없다. 그의 노랫말과 목소리, 곡조와 박자를 단서 삼아 힘껏 상상하고 느껴보는 수밖에 없다.
이윽고 번역이 시작될 때, 우리는 반드시 과거와 만나게 된다. 쉽게 만날 수 없는 그것은 분명 타임머신보다 더 위대하고 어떤 기록보다 피부에 와 닿는 황홀한 경험일 것이다.
* 감상 - 번역의 시작 / 조해진
* 뻘하게 책을 읽으면서 중고등학교 때 암기하던 방법이 자꾸 떠올랐다. 잘 안 외워지는 건 꼭 다른 거랑 연결 지어서 외웠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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